오늘 존경하는 어떤 분 이야기를 듣다가 몇 년간 잊고 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말은 ‘파워오브원(power of one)’입니다.
아마 몇몇 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이것은 1992년 개봉한 영화 제목입니다.
이 영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독립하기 전에 당시 남아프리카의 암울한 흑인들의 삶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둠과 암울함이 무한정 이어질 것 같은 시대적인 상황. 하지만 그들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rainmaker의 전설이 있습니다.
영화 끝에서는 남아프리카가 독립을 한다거나 하는 해피엔딩의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 엔딩테마가 나오면서 나오는 설명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은 여러 사람을 바꿀 수 있고,
여러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독립할 때도, 우리나라가 독립할 때에도, 독일이 통일할 때에도 결국은 이런 구조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칼릴 지브란(1883-1931)은 예언자의 땅 레바논의 비샤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1895년 그는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나 2년 후 다시 레바논으로 돌아와 베이루트의 '지혜의 학교'를 다니고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1908년 파리에서 조각가 오귀스트 로뎅을 만나 3년간 미술 공부를 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인류와 평화와 화합, 레바논의 종교적 단합을 호소했다.
젊은 시절 지브란은 빈곤과 불의와 부패, 제도화된 폴력을 규탄하며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 열렬한 인권옹호자였다. 또한 이미 20세기 초에 아름다운 지구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자연을 경배하고 보호하며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선각자였다.
자신의 영혼 속에 동양의 신비주의를 간직하고 있었던 지브란은 문학을 통해 동양과 서양을 한데 녹여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영성과 물질주의를 높은 차원에서 결합시킴으로써 신비로운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그는 영혼의 양식이 결핍했던 황량한 시대에 '신의 세계가 인간의 양식'임을 외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지브란에게는 시인, 화가, 철학자, 예언자, 신비주의자, 종교가, 이단자, 저항하는 사람, 평화주의자... 등의 수많은 명칭이 따라다닌다.
초기 작품들은 아랍어로 씌여진 산문시와 희곡들로 모든 아랍권에 널리 알려져 지브라니즘(Gibranism)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지브란은 1931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심한 폭풍우가 정원에 몰아치던 어느 날 저녁
알무스타파와 그의 제자 아홉 명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불 주위에 둘러앉아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에 한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저는 외롭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발굽들이 저의 가슴을 무겁게 짓밟아 누르고 있습니다."
그러자 알무수타파가 일어나 제자들의 한 가운데에 서서
세찬 바람소리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외롭다고 하지만 도대체 너희의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너희는 이 세상에 홀로 왔고
혼자 안개 속을 헤쳐 나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너희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잔을 혼자 마셔야 하리라.
가을의 날들은 너희들 각자에게 각각 다른 잔을 주었고
그 잔들을 달고 쓴 포도주로 채웠으니
비록 그 잔이 그대의 피와 눈물로 채워진 잔이라 하더라도
그대들은 혼자서 조용히 그 잔을 마시고
그 삶의 갈증을 선물로 준 생명에 대해 찬양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그 목마름이 없었다면
그대의 가슴은 물결도 파도의 노래도 없는
황량한 바닷가의 해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니,
그대들은 그대의 잔을 혼자 기꺼이 마시라.
잔을 그대의 머리위로 높이 들고
홀로 마시는 사람들을 위해 흠씬 마시라.
한때 나는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같이 어울려 다녔고
그 사람들 속에 섞여 연회석에 앉아 함께 흠씬 마셔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포도주는 내 머리에까지 이르지 못했고
내 가슴속으로도 흘러 들어오지 못했다.
그것은 오직 나의 발걸음 쪽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지혜는 메말랐고
나의 마음은 자물쇠가 채워져 봉인(封印)되었다.
그리고 오직 내 발걸음만이 그들과 함께
그들의 안개 속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사람들 무리에 어울리지도
그들의 식탁에서 그들과 어울려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그대에게 말하나니,
비록 시간의 발굽들이 그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더라도
그런 것은 그대와 상관없는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대, 슬픔 속에 홀로 앉아
그대의 잔을 마시는 것이 그대에게는 더 나으리니,
그 때 그대는 또한 그대의 기쁨의 잔도 혼자 마실 수 있게 되리라.
드라마 「궁」이나 「덕혜옹주」, 「노서아가비」같은 소설이 인기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점점 그 블랙박스 안이 궁금한가봅니다.
일본은 역사소설이 많이 발달한 나라라고 느껴집니다.
허구를 추가했다는 관점보다는 사람들이 역사적인 상황에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의 심정과 감정적인 고뇌에 많이 공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보기에 가장 인기있는 주제는 임진왜란 직전에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직전신장)로부터 시작해서 토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풍신수길)이 정권을 잡고, 그 이후에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경)가 일본을 통일을 할 때까지의 전국시대이고, 두번째로는 막부말기에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각지의 지사(志士)들의 싸움부분입니다.
전자에는 오다노부나가, 토쿠가와 이에야스, 미야모토무사시(宮本武蔵)와 사사키고지(司馬 遼太郎)로, 다테마사무네(伊達政宗) 등등의 좋은 소재가 있고,
후자에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나 신센구미(新選組:신선조)란 좋은 소재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를 뛰어넘어 그 당시의 상황에 주인공들이 어떤 감정적인 고뇌를 했을 지를 추측해서 만들어진 소설에, 계속적인 상상이 추가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덕혜옹주는 망국의 왕조를 상징하는 인물일 뿐이고, 정치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고종은 좀 사정이 다릅니다. 당시 국가의 최고 책임자였으니까요.
이제가지 고종의 평가는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증거를 찾아보면 고종은 결코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가 아니였습니다.
드라마에 고종만 나오면 시청률이 2~3%포인트 떨어진다고 후배 PD가 그럽디다. 고종과 조선이 부패와 무능으로 멸망했다는 일본의 논리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도 오염돼 있습니다. 조선은 결코 부끄러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고종은 온몸을 던져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책임감 있는 군주였어요. 고종이 아니었다면 1890년대에 이미 일본에 먹혔을 겁니다.
박문영 ‘독도는 우리 땅’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작사·작곡,소설『제국의 부활-황제』집필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 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 일가에게 끌려 다녔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를 이룬다.
스워터트는 미국인 데니(O. Denny)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면서, 위 해링턴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데니는 본래 이홍장이 자신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조력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조선 정부에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이 된 데니는 자신의 나라를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개군주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업무로 삼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특별한 이력은 조선의 평가 자체에 대해 신뢰성을 더해 준다. 그리고 고종이 고빙한 서양인 고문중 한 사람이자 개신교 선교사였던 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
또한 1895년에 한성신문 기자로서 을미사변에 직접 가해자로 참여하기도 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근대조선사》 상·하(1936년, 1939년, 鷄鳴社, 京城)에서 상당히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기쿠치는 《근대조선사》를 쓰기에 앞서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고종태황제실록》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으게 된다. 그의 논조는 대체로 《코리아 레퍼지터리》와 비슷하여,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단지 열강에 포위되어 내정보다는 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끝내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기쿠치는 다른 일본 학자가 거론하지 않은 평양 이궁 조영(造營)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고종의 치적을 제정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나빠짐에 대비한 시책이라고 평가하였다.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는데, 그 친서에는 일본이 황성을 침탈하게 됨을 고종이 이미 예측하였음이 밝혀져 있고, 이러한 동맹 요청을 평양 이궁 조영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밖에도 고종 시기에 설치된 각종 근대적 기구나 받아들여진 서양 문물을 개화파나 독립협회의 치적으로 보지 않고 고종의 업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오히려 일본에 합병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산멸했다고 보았다.
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견해
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는 1896년 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뒤, 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내다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한국의 국왕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과 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국왕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국왕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평을 하였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하여, 진보적이며 또한 다른 동양 나라와는 달리 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종교 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던) 대원군 집권 때와는 달리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국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하면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비호를 받고 있던 친일경력자들은 의도적으로 망국의 책임을 황실에만 모는 등 황실인사들이 설 자리가 없게 했다. 이는 절대권력을 원한 이승만 대통령과 망국의 책임을 황실인사에게 책임을 몰아 냉대하였다. 친일경력자들 역시 망국의 실제적 공동 책임자인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면하려고 왕실에게만 책임을 전가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
해방 직전 옛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일본 방송인 출신 작가 혼다 세쓰코는 1980년 한국에 번역된 책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범우사)에서 영친왕의 비서를 지낸 조중구의 메모를 통해 1945년 해방 직전 옛 조선 황실의 재산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옛 조선 황실의 재산은 부동산 △임야 6만4천 정보(1정보는 3천 평) △밭 91만 평 △논 32만 평 △택지 31만 평, 동산은 △미술품 1만 수천 점 △은행예금 680만엔 △유가증권 250만엔 △현금 50만엔 등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메모에 전국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궁전과 묘지는 빠져 있다.
1954년 제정된 ‘구황실 재산처리법’으로 이 재산은 국가 소유가 됐지만, 온전히 국고로 보전되지 못한다. 김을한씨는 <인간 영친왕>에서 “동산은 말할 것도 없고 임야나 토지 등의 막대한 부동산이 불하나 임대계약의 형식으로 당시 권력가들이 나누어먹기로 다 가져갔다”며 “이렇게 털린 땅이 서울 근교만 해도 수십만 평은 된다”고 적었다.
꼬리가 길면 결국 잡히게 돼 있는 법이다. 보다 못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당시 대한여행사 이사장이던 오재경(작고)씨를 구황실재산 사무총국장으로 임명해 사무총국 개혁에 나선다. 그는 문교부 국장으로 있던 이창석씨를 데려다가 옛 황실의 재산 관련 서류를 꼼꼼히 모아 조사에 돌입하려 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60년 6월6일 밤 서류를 쌓아둔 창덕궁 내 구황실재산 사무총국이 불에 타 전소된 것이다. 불이 난 뒤 이씨는 “이것은 방화가 확실하다”고 말했지만 사건은 유야무야 덮히고 말았다.
김을한씨는 <인간 영친왕>에서 “그 뒤로 10여 년 동안에 벌써 여러 사람의 사무총국장이 파면 또는 철창 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봐 구황실 재산이라는 게 얼마나 무문하고 이권의 대상이 돼왔는가 알 수 있다”며 “사무총국이 황족들에게 겨우 몇십만원의 생활비를 주며 자기 돈을 거저 주듯 한다”고 말했다.